다락방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
동삼제일교회가 짧은 시간 동안 큰 부흥을 이루게 된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부산노회 내의 다른 교회들, 특히 지역에 있었던 이웃 교회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질시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이 교인들의 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대해
기분이 상해 있었던 일부 목사들에 의해서, 류광수 목사의 설교에 대해 꼬투리를 잡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부산노회는 이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류광수 목사에 대한 재판을 실시하였고, 일차적으로 영도 밖에서의 모든 전도활동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당시 동삼제일교회는 13개 선교관을 마련하고, 부산 전역에서의 전도운동을 일시에 펼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상태였는데,
이것을 모두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이 소식은 동삼제일교회 성도들을 분개하게 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교단에서 전도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것이 교회에 팽배한 분위기였습니다.
이에 따라 동삼제일교회는 공동의회를 열고 합동 교단을 탈퇴할 것을 결의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부산노회는 결석재판을 열고, 류광수 목사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면직·출교·제명이라는 처분을 내리게 되었습니다(1991).
그리고 이때 제기 되었던 시비가, 2017년인 현재까지도 다락방 전도운동이 이단이라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단누명에도 불구하고 다락방 전도는 보다 빠르게 전국적으로 확산 되어 1994년 12월 말 기준으로 전국에 67군데, 해외에 3군데
전도학교가 세워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1994년 말부터 전국의 각 교단으로부터 ‘면직 된 자와 함께하는 것은 이단성에 맞먹는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취지의 경고들이 떨어지게 되고 이듬해부터 각 교단에서 각자의 사정에 따른 이단 정죄와 함께 다락방 전도에
참여하고 있는 자교단 목사들에 대한 면직 조치를 실행하게 됩니다. 1996년은 다락방에 너무나 중요하고도 아픈 해가 되었습니다.
면직이란 살아있는 한 어떤 경우에도 유지되고 보호된다고 해서 '항존직'으로 불리는 목사의 직분을 목사의 소속 노회에서 박탈한다는, 목사에 대해
교계에서 내릴 수 있는 최대한의 중징계입니다.
류광수의 다락방 전도를 지속할 경우 교단의 징계를 피할 수 없다는 공지가 하달 된 후, 대부분의 해당 목사들은 교단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며
다락방을 떠나갔습니다. 징계를 감수하고라도 이 전도운동을 포기할 수 없다던 목사들 중에는 뒤에서는 비공식적으로 "우리도 다락방이 이단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저 '다락방을 안 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기만 하면 된다"라는 식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분들도 상당히 있었습니다.
1996의 면직 광풍 때 이런 저런 신학적 이유를 들어가며 이단 처분을 내린 교단들도 있었으나 몇몇 교단들은 차마 이단성을 문제 삼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유는 개혁주의 보수신학을 고수하는 해당 교단에서 다락방에 참여 된 목사의 수를 헤아려 보니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이단성을 문제 삼으면 그 교단의 신학의 건전성이 의심받는 사태가 염려 되고, 교단의 신학에 문제가 없다면 해당 교단의 수백 명의 목사들이
다락방의 신학적 무오성을 보증해 준 모양새가 되어버리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철저히 정치적인 사유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교단들이
있었고 이런 것들이 다락방 이단론에 근거가 없는 것임을 증명해주는 단서들이 됩니다.
이러한 전국 교단들의 연쇄적인 이단정죄와 면직 처분 사태의 배경에는 류광수 목사의 면직 된 신분과 씌워져 있는 이단혐의의 굴레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여전히 따르고 있어 이들을 중심으로 교단을 만들어져 연쇄적인 교단 탈퇴의 사태가 벌어지진 않을까 하는
우려가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면직 사태 이전까지는 류광수 목사 자신도 절대 교단을 만들지 않겠다고 천명하고 있었으며 실제 어떠한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96년에 다락방 전도를 지속하겠다고 결정한 이유로 너무나 많은 목사들이 소속 교단 없이 유리방황을 하게 되고, 신학생을 양성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97년에 결성 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도총회'는 시작부터 "오직 전도와 선교를 위한 총회"로, "전도에
방해가 된다면 총회도 해산하겠다."는 초대 총회장 박지온 목사의 선언과 함께 시작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확실한 이단이 된 결과 교회와 목회자들 뿐만 아니라 평신도들과 어린 후대들까지 입어야 했던 피해와 안고 가야만 했던
마음의 짐은 상당했습니다. 그 길을 가며 다락방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 원칙을 분명히 가졌습니다.
첫째, 세속법의 영역으로 이 문제를 끌고 가서 불신자들에게 교계가 웃음거리가 되게 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언제든 기성 교계에서 누명을 벗겨주고 받아준다면 돌아가서 지도를 받으면서 교계를 섬기며 함께 전도운동을 한다는 자세를 갖췄습니다.
셋째, 이단누명이 환난 같지만 사실은 가장 순수하게 전도를 할 수 있게 하고 진짜 이유와 핑계가 없는 제자를 찾아 세울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울타리라는 영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갖췄습니다.
이렇게 오직 전도를 지속하던 전도총회에 개혁총회 측의 영입제의가 2011년에 들어오게 되고 이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믿음 속에서
그렇게 어렵게 세워졌고 지켜왔던 전도총회의 간판을 내리고 개혁총회에 들어가 한국 교계의 구성원의 자리로 복귀를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찬반으로 인해 다시 한국교계가 한기총과 한교연으로 양분되는 사태 속에서 여전히 다락방 문제는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습니다.
현재 많은 논의들이 오가고 있지만 다락방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를 내놓으면서라도 한국 교계를 섬기고, 온갖 문제로
확연하게 갈라져있는 교계가 다시 한 몸을 이루게 하는데 마중물의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락방 이단 논쟁에 대해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단 근거의 추출 방식에 관하여 (0) | 2018.06.20 |
---|---|
다락방은 왜 이단이 되었는가? (0) | 2018.06.20 |
다락방 운동의 시대적 배경 (0) | 2018.06.20 |
다락방이란 무엇인가? (0) | 2018.06.20 |